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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찻사발축제에서 울려 퍼진 문경새재아리랑문경찻사발축제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지난 4일 오전 11시 문경새재오픈세트장 광화문 옆 주무대에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가 아리랑 공연을 선사했다. 이날 ‘계절의 여왕 5월’이란 말이 실감 나게 청명한 하늘과 연초록 나뭇잎을 흔드는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5월 첫 연휴 첫날 나들이 나오신 관광객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정적인 무대와 환호하는 관객이 하나가 되는 공연을 개최하였다. 공연의 주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으로, 찾사발축제를 찾아오신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신명나는 아리랑 공연을 펼쳤다. 이만유 위원장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결성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고 실제적 '아리랑고개'가 문경새재라는 것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보급하고 확산하는데 힘을 모우고 있다."라고 전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찾아가는 아리랑공연과 아리랑학교,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통해 문경새재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이날 공연 사회는 황동철 이사가 맡아 진행하였고, 한두리국악단(단장 함수호)이 협연하였는데 함께한 해금, 장고, 징, 북, 피리, 태평소, 가야금이 무대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첫 무대에서 해설을 맡은 이만유 위원장이 공연 주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경새재아리랑 유래 및 특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한복을 곱게 입은 아도위합창단이 문경새재아리랑, 문경풍년아리랑, 본조아리랑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 국악인 3명이 노래가락, 태평가, 창부타령으로 분위기를 돋구었다. 이어서 휘날레에서는 관객과 어울려 춤추는 하모니카 연주와 신명나는 선반설장고 공연으로 마무리하였다. 아리랑축제의 노래/ 이만유 싱그러운 5월 찻사발축제장 무대 위에 알록달록 핀 꽃 꽃 꽃 문경새재 아리랑고개 한민족 혼이 담긴 아리랑 관광객과 어울려 부른 노래 팔랑팔랑 나비처럼 멀리멀리 날아가면 오천만 가슴속으로 꽃물처럼 살포시 스며드는 우리의 소리, 희망의 노래 문경새재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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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문경의 용(龍) 이야기 3이만유/향토사연구원 전국 곳곳에 용과 관련된 지명에는 용이 살았거나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을 품은 소(沼)가 많은데 그 명칭이 다양하다. 용연(龍淵), 용호(龍湖), 용지(龍池), 용당(龍塘), 용추(龍湫), 용담(龍潭), 용천(龍泉), 용정(龍井), 용소(龍沼) 등이다. 각각의 용어가 가진 명확한 뜻을 알 수 없지만, 필자가 보기엔 용추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아래 깊은 웅덩이가 있는 곳이고, 용연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다가 물이 깊고 넓게 고여 있는 곳이며, 용소는 규모가 용추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웅덩이를 말하는 듯하다. 문경 지역에도 이런 명칭을 가진 곳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경팔경’의 하나로서 가은읍 용추계곡과 문경새재 용추폭포, 마성면 봉생정 앞 두물머리에 있는 영강구곡 제9곡인 용연 등이 있다. 용추계곡 용추에는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의 비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으며, 깊게 파인 소(沼)의 형태가 하트 모양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엉뚱한 생각을 하며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용추에는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다. 기우제를 지낼 때 돼지 등 살아 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데 제를 올리면서 용추 바위 위에 짐승의 붉은 피를 뿌리는 풍습이 있다. 이는 하늘로 승천한 용이 보았을 때 신성한 자기 영역이 부정한 피로 더럽혀져 있으니 이를 씻어내기 위해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기우제 효험이 바로 나타난다고 한다. 다시 문경시의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을 찾아보았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 가은읍 희양산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유랑 중에 심충(沈忠)이란 사람의 청을 받아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큰 못을 매립할 때 여기에 살고 있던 용을 구룡봉(九龍峯)으로 쫓아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원북리(院北里)에는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 하여 ‘용서덜’이라고 한다. 마성면 상내1리에 용주사가 있고, 신현3리(봉생-鳳笙)에는 군왕지지(君王之地)인 어룡롱주형(魚龍弄珠形) 지형의 어룡산(魚龍山-617m)이 있고, 남호1리 용마골이 있다. 문경읍 문경새재 조령산성 안에는 조선 시대 군창(軍倉)과 용화사(龍華寺)가 있었다는 ‘용사골’이 있다. 지금은 용의 기운이 서린 땅이어서인지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고 그 촬영장 안에 용이 왕이고 왕을 용으로 인식하듯 왕의 침전인 강녕전 등 왕궁이 있으니 땅 이름값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마원리에 용마가 땅에서 솟아 승천했다는 용마골(龍馬谷)이 있고, 팔령리(八靈里)에는 용이 등천했다는 용추폭포가 있으며, 당포리(唐浦里)에도 역시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추(龍湫)가 있다. 용연리(龍淵里)에 용뢰산(龍磊山), 용연천(龍淵川), 용지등(용재), 회룡원(回龍院), 돌무더기가 용의 비늘처럼 생겼다고 하는 ‘용서들’ 등의 용 관련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천 년 묵은 구렁이와 지네가 서로 먼저 승천하기 위하여 보름 동안 밤낮없이 싸운 끝에 구렁이가 이겨 용으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때 싸움이 격렬한 그곳의 땅이 움푹 패어 지금의 호수 ‘용연’이 생겼다고 한다. 갈평리(葛坪里)에는 용흥초등학교(龍興初等學校)가 있고, 옛날 교촌리(校村里)에는 신비로운 구름과 안개 자욱한 이곳 골짜기에 남자아이 9명이 들어갔다가 끝내 나오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들을 위하여 제사를 올리고 기원을 드렸더니 9마리의 용(龍)이 하늘로 올랐다는 구룡골(九龍谷)이 있다. 영순면 오룡리(五龍里)는 중국 송나라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여선재(余善才)를 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의령여씨(宜寧余氏) 여덕윤(余德潤)이 조선 태종조(1400~1418) 때 이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아들 오형제(五兄弟)가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벼슬길에 올라 사람들이 용이 다섯 마리 났다 하여 오룡골(五龍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호계면 용암보(龍巖洑)는 이곳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보의 이름을 용암보(龍巖洑)라 하고, 용암보의 물로 관개하는 견탄리 들을 용암들이라고 하였다. 부곡리 오얏골은 10년마다 여는 400여 년 전통을 지닌 ‘오얏골 별신굿’이 유명하다. 이 별신굿을 지낼 때 용이 산다는 암굴과 숫굴 2개의 천연동굴인 용담(龍潭)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제물용 떡을 담은 ‘용시루’라는 것도 있다. 별암리는 원래 마을 이름이 굴암(窟岩)이었는데 굴속에 살던 용이 등천하여 그 굴이 빈 굴이 된 후로는 마을 옆에 흐르는 영강 물속에 자라 모양의 바위가 있어 ‘자라바위(별암-鱉岩)’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점촌2동에는 용지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에 용이 살았다는 못이 있어 용지(龍池)마을이라 불렀고 날이 가물면 주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지금은 못이 없어졌지만, ‘용지샘’은 남아있다. 점촌4동에는‘미르실’ 일명 ‘진곡(辰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1800년경 평산신씨가 이주하여 개척할 당시 미르실 또는 진곡이라 불렀다. 미르의 뜻은 용을 의미하며 진(辰)자도 십이지 중 용(龍)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강구곡 제2곡인 ‘송정소’에는 천 년을 기다려야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송정소에서 잠수하여 보니 큰 굴이 있고 거기에 눈이 꽹과리만 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이곳에서 젊은이가 수영하다가 매년 한 명씩 원인 모르게 익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들려줄 용 이야기는 ‘영신도령과 영신들’이다. 옛날에 ´미지니´ 마을에 최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했지만, 야망을 품은 성실하고 힘세기로 소문난 영신이라는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여름밤, 곤히 잠을 자고 있을 때 절세미인인 한 여인이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청을 들어주면 자기도 영신 총각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기에 호기심으로 "좋습니다. 청이 무엇이오? 하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소저는 사람이 아니고 송정소에 사는 암용인데 내 남편인 수룡과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오던 중 얼마 전부터 이웃 요사한 암용을 만나 즐기고 소저를 싫어하니 그 암용을 죽여주시오. 내일 새벽 뒷산(돈달산)에 내려와서 놀고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처치하면 됩니다” 하고 칼과 잿봉지를 놓고 사라졌다. 영신 총각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보니 머리맡에 실제로 어젯밤 꿈에서 본 칼과 잿봉지가 있는지라 신기하게 생각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결심하고 곧 칼과 잿봉지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용이 내려와서 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어느 것이 암용인지 수용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날은 밝아 오고 급한 김에 앞에서 아양을 떠는 듯한 용이 암용이라 생각하고 칼로 내리쳐 죽였다. 그리곤 잘려 나간 머리가 펄떡펄떡 뛰고 있어 목이 다시 붙을까 봐 용의 목에 재를 뿌리고 정신없이 내려왔다. 그날 밤이었다. 어젯밤 그 여인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총각이 죽인 것은 암용이 아니고 내 남편 수룡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며 슬피 울면서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하지요” 하고 총각에게 소원을 물으니, 그는 최부자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여인은 영신에게 이르기를 "문종이와 지릅대(삼의 껍질을 벗긴 대)을 준비하여 영신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비가 그칠 때까지 뒷산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물이 빠지고 새 들판이 생기거든 깃발을 꽂아서 표시하세요. 그럼, 그 땅이 총각의 땅이 됩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그날부터 줄곧 보름 동안이나 큰비가 내리어 온 천지는 물바다로 변하는 동시에 점촌에서 함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영신 앞으로 흐르면서 높던 뒷산이 깎여 돈짝만큼 작아졌고, 그때 산의 일부가 떨어져 흐르다가 멈춘 곳이 지금 송정소 앞의 딴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신은 암용이 시키는 대로 비가 그치자, 산에서 내려와 깃발을 꽂아 표시한 후 자기 땅을 만들었으며, 황폐한 들판을 부지런히 가꾸어 자기 소원을 이루고 큰 부자가 되었다. 이곳 윤직동 용지(龍池)마을 뒷산, 용지산에는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는 ‘용무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렇듯 옥토‘영신들’은 신비로운 전설을 머금고, 문경 지역 생명의 젖줄 ‘영강’ 맑은 물을 받아들여 가을이 되면 들판 가득 황금물결 출렁이는 풍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PS 청룡은 희망과 성취를 상징합니다. 모두 2024년 갑진년(甲辰年) 올해에는 무병장수와 소원성취하시고 국민이 행복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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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갑진년(甲辰年), 문경의 용(龍) 이야기 2이만유/향토사연구원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조선 중종 22년(1527)에 어문학자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용(龍)’자를 ‘미르 용’이라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하늘에 거대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보이는 은하수를 우리 조상들은 큰 용이라고 생각하여 ‘미리내’라고 했는데 ‘미르’가 용(龍)을 뜻하므로 미르와 개천, 시내를 뜻하는‘내’가 합쳐서 용의 내[川], ‘미리내(미리는 미르에서 변천한 것)’가 된 것이다. 문경시 산양면 진정1리(辰井一里)에 ‘미르물’이란 마을이 있다. 조선조 초기 초계변씨 이흠(李欽)이란 선비가 이곳에 정착하여 보니 마을에 우물 3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어 그 형상이 용같이 생겼다 해서 미르물(미르우물)이라 하였고, 용이 살던 우물이 있다 하여 미르물(辰井) 이라고도 하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상․중․하 용정(龍井)이 남아 있다. 또 미르물 동북쪽에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정착해 살고 있는 텃골에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지형의 비룡상천지형(飛龍上天之形)을 이루고 있는 청룡산(靑龍山)이 있다. 그리고 진정2리(辰井二里) 추산(秋山)에는 제주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낸 추재 김진석(秋齋 金振錫)의 장수지소(藏修之所) 추룡대(秋龍臺)가 있다. 산북면 김룡리(金龍里)에는 전통사찰인 운달산 김룡사(雲達山 金龍寺)가 있다. 김룡리는 480년경 효성이 지극한 김장자(金長者)라는 사람이 정착해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영롱한 일곱 빛 무지개가 빛나면서 김장자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이 마을을 김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10년(588)에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하고 운봉사(雲峯寺)라 하였는데 김장자(金長者)가 용초에 살던 용왕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 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김룡리라 하고, 절 이름 또한 김룡사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문경팔경인 운달계곡(雲達溪谷) 냉골에는 용이 살다 승천하였다는 용추(龍湫)가 있고 김룡사 암자(庵子)인 금선대(金仙臺)에는 용왕탱(龍王幀)이 봉안되어 있다. 산북면 이곡리(梨谷里) 배나무지 남쪽에는 옛날에 용(龍)이 살았다 하여 용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으며, 용바우 아래는‘용바우소’라는 깊은 소(沼)가 있다. 석봉리 희룡골(希龍谷)에도 회오리치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그 소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가 한 마리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희룡골이라 불리어졌다. 종곡리(種谷里)에는 마을 앞산의 모습이 나는 용의 형상으로 된 비룡산(飛龍山)이 있어 마을 이름을 비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 북쪽 큰 바위 아래 소(沼)가 있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용난소(沼)라고 부른다. 약석리(藥石里)구룡판(九龍板) 용호동(龍湖洞)에는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구룡판이란 지명은 구룡산 남쪽 산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 마을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구룡판이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조선에 큰 인물이 날 지세라며 군사들을 시켜 산혈(山穴)을 끊어 버리자 아홉 용의 피가 흘러 이 지역 모든 흙의 색깔이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회룡리(回龍里)는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흡사 용이 몸을 뒤틀며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회룡이라 하였으며, 1963년 이 냇물을 막아 ‘회룡못(回龍池)’이 축조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이제 용의 안식처가 생겨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내리(池內里)에는 용마산(龍馬山)이 있다. 동로면 명전리(鳴田里) 당골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고 이 연못 가장 깊은 곳을 용소(龍沼)라 하는데 아주 옛날 용(龍)이 승천을 하다가 벼락을 맞아 연못에 떨어져 죽었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또 벌내에 있는 보(洑)를 용이 살고 있다고 해서 용보(龍洑)라고 하였다. 농암면 사현리에도 용바우 지명이 있고, 뭉어릿재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는데,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해서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 농암리(籠岩里)에는 새장터 북쪽 가실목고개 아래에 ‘청룡끝’ 또는 ‘청룡등끝’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고려말 청룡사(靑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청룡골이라 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의 등 끝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룡등끝’이라 부른다고 한다. 선곡리 칠봉산에도 용과 관련된 용소곡(龍沼谷:용추골)이 있다. 내서리 쌍룡계곡(雙龍溪谷)은 도장산 자락의 옥계수가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가는 계곡으로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며 청룡과 황룡이 희롱(戲弄)하며 살던 곳이라 하여 용유동(龍遊洞)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여기에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간다는 깊은 용소(龍沼)가 있다. 신라 시대 고찰인 심원사(深源寺)가 있고 조선시대 유학의 꽃이며 성리학을 구현하는 공간으로 화운(華雲) 민우식(閔禹植)이 경영한 쌍룡구곡이 있는 곳이다. 연천리에는 용이 산다는 용추(龍湫)가 있는 궁기천 변에 후백제 왕 견훤과 관련된말바우(마암-馬岩)가 있다. 견훤이 왕이 되기 전에 오색 운무가 자욱한 어느 날, 이 바위에서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하늘이 내린 용마(龍馬)를 얻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이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견훤이 한껏 상기되어 용마가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를 시험해 보려고 적지산으로 화살을 쏘는 동시 말을 달려 목표지점에 이르니 이미 화살이 꽂혀 있는지라 견훤이 크게 노하여 "이놈이 무슨 용마냐”고 소리치며 칼로 용마의 목을 베어버리자 순간 퓨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견훤이 처음 본 화살은 전날 무예를 수련하며 쏜 화살이었다. 이에 견훤은 ‘시불이희여 장차내하오(時不利 將次奈何, 세월의 불리함이여 장차 어찌할거나)’하며장탄식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고 전해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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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2월 1일 "서양 오선보에 아리랑이 채보되어 발표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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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갑진년(甲辰年), 문경의 용(龍) 이야기이만유/향토사연구원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의 해’라 한다. 올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41번째로 갑진년(甲辰年)이 된다. 다시 말해 ‘푸른 용의 해’라 함은 천간(天干) 10개 중 갑(甲)으로 푸른색에 해당하고, 지지(地支)의 12개 중 5번째로 용을 뜻하는 진(辰)이 되어 갑진년(甲辰年)‘청룡(靑龍)의 해’가 되는 것이다. 용(미르)은 권위를 상징하는 전설 속 신수(神獸)로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에 속하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과 신통력을 지녔으며 특히 비와 물과 관련된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청룡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벽사신(辟邪神)으로 사신도(四神圖)나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보는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 중의 하나이고 동쪽을 지키는 신이다. 용의 모습은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81개)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영묘한 구슬, 여의주(如意珠)를 지니게 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 생활을 영위하면서 우순풍조하길 바라며 풍농(豊農)과 풍어(豊漁)를 빌기 위해 용왕제·용왕굿·용신제·기우제를 지내는 등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용은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하며, 물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으로 용왕·용왕할머니 등으로 부르며 모시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또한,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상서로운 힘을 지녀 호국(護國)과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성인의 탄생, 군주의 거국적인 대사(大事)에 여러 차례 용이 출현하는 기록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명성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용의 핏줄이라고 해서 왕씨 성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고려 왕 씨 후손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 있다고도 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고,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것이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얽힌 설화 등에서 호국룡임을 엿볼 수 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 있는 사정전(思政殿) 안에는 ‘용상 체험장’이 있다. 거기에는 용상(龍床)과 왕이 입는 의대(衣帶)가 준비되어 있는데,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龍)’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호칭을 쓴다. 이를테면 용상(龍床)은 물론이고 용좌(龍座), 용포(龍袍), 용안(龍顔), 용루(龍淚), 용음(龍音), 용선[龍扇] 등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위의 용과 관련된 낱말을 다 말하고 난 뒤, "그럼, 왕이 누신 응가(대변)는 무엇일까요?”라고 질문하면 "용똥”하는 대답이 나온다. 그래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는데, 정답은 ‘매화’라고 한다. 변기는 ‘매화틀’이라 하고요. 그리고 용포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왕을 상징하는 용문(龍紋)을 수놓은 용보(龍補)를 가슴 ·등 ·양어깨에 장식하였는데, 왕과 왕비가 입는 의대(衣帶)에는 오조룡(五爪龍-발톱이 5개 있는 용),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은 삼조룡(三爪龍)을 붙여 발톱 수로 지위를 나타냈다. 일설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오조룡을 쓸 수 있고, 조선의 왕은 사조룡을 쓴다고도 하였다. 문경에는 대승사, 김룡사, 봉암사 등 전통사찰이 7곳 있다. 사찰마다 범종(梵鐘)이 있고 범종의 가장 위쪽에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가 있다. 이것을 종뉴(鐘紐) 또는 용뉴(龍鈕)라고 하고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달 수 있다. 용생구자전설(龍生九子傳說)에 의하면 용이 낳은 아홉 자식에는 비희(贔屭), 이문(螭吻), 포뢰(蒲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복(蚣蝮),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는 용이 있다. 범종의 고리에 있는 용은 포뢰(蒲牢)라고 하는 용이다. 포뢰는 소리 지르는 걸 좋아하는 용인데, 특히 바다에 사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를 보기만 해도 놀라 비명을 크게 지른다고 한다. 그래서 장인들이 포뢰 형상을 만들어 종의 윗부분에 장식하고 고래 모양의 당(경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경악하여 큰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에 따라 종소리도 멀리까지 크고 우렁차게 들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범종 소리를 일명 경음(鯨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간한 ‘띠 지명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 고시 지명 약 10여 만개 중 십이지(十二支) 동물 관련 지명은 4,109개인데 용과 관련 지명이 가장 많아 전국에 1,261개나 되며, 경상북도는 174개가 된다고 한다. 그중 문경에는 어룡산(魚龍山) 1개만 조사되어 있으나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 지역의 용 관련 지명은 수십 개 있다. 그럼, 지금부터 문경에서 용과 관련된 지명과 용(龍)과 얽힌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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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사인(先史人) 주거지로 추정되는 ‘바위그늘 유적’ 발견향토사연구원 이만유 낙동강 상류 금천(錦川)이 흐르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필자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2020년 4월 2일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이란 제목과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이란 부제를 달아 언론에 보도한 바가 있는데 이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행정당국에 보존 대책을 건의한바 관련 부서에서 현지 확인하고 보존 가치와 청동기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1월 13일 고고학 전문가이신 세종문화재연구소 유병록 박사를 모셔서 현지 조사를 할 때 필자도 동행하였다. 이날 왕태리 청동기 유적 현지를 보고 난 뒤, 유병록 박사와 여운황 문경시 문화예술과 문화재관리팀장과 함께 금천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기존 청동기 유적을 탐방하기로 하여 필자가 현지로 안내하였다. ‘연소리 대형 성혈석’ ‘ 녹문리 성혈석 군집지’ ‘현리 성혈석 너럭바위’ ‘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천변 현리 야산 남쪽에 있는 대형 바위를 살펴보든 유병록 박사께서 "암음(岩蔭-바위그늘)이다”하는 외침이 있었다. 깜짝 놀라 셋이 모여 움푹 들어간 바위 밑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도자기편(분청사기, 백자)과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었다. 선사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나 지형이 덮이고 묻혀있어 그때와는 지금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쉽사리 ‘암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연 이곳 대형 바위와 그 주변이 선사시대인들의 주거지인‘바위그늘’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발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바위그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위그늘유적’은 동굴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존재하는 대형 바위 아래 그늘을 이용한 선사인들의 주거지다. 자연 절벽에 그늘이 진 곳, 풍화작용에 의해 오목하게 형성된 곳, 하천이나 바다의 절벽에 파식작용에 의하여 움푹 파인 곳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남쪽으로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늘 내부와 그늘의 트인 앞에 선사인들이 사용한 유물이나 생존을 위해 취했던 동·식물 등을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위그늘유적’이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부산 금곡동 율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유적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적이 외국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문경에서 ‘바위그늘유적’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얼마 전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읍 마원리 문경역 주변 공사장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소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경지역의 역사가 청동기시대에 머물다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하고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분포된 금천 일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다’라고 말해 왔는데 이곳의 대형 바위가 발굴 과정을 거쳐 ‘바위그늘’로 최종 확정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필자의 추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하루빨리 당국에서 ‘현리 바위그늘 선사유적’ 발굴 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묻혀있는 역사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울러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문경시 전체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성혈석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 대책도 함께 세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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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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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국악신문 사할린동포장학회, 러시아 동포 청소년 장학금 전달(주)국악신문(기미양 대표이사)가 주최하는 사할린동포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이 25일 국악신문 주필실에서 개최되었다. 수상자는 신마이야 학생과 싸프로노브 안드레이 학생이다.신마이야 학생은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 1학년으로 사할린 한인 한국어 교육의 선구자 공노원(전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선생의 손녀이다. 수상 이유는 2017년부터 사할린과 한국에서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와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사할린아리랑'을 지속적으로 알려오고 있다. 싸프로노브 안드레이는 인천연수구 청학중학교 3학년으로 고려인 4세이다. 수상 이유는 5살부터 가라데를 시작하여, 카자흐스탄에서 가라데 유럽 챔피온을 따고 나서 한국에 이주하였다. 2020년 동경에서 열린 세계청소년가라데대회에서 세계 챔피온을 거머쥔 꿈나무이다. 국내 다문화사회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국악신문 사할린동포장학회에 장학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은 다음과 같다. 국악계 장문희(전북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김나영(아리예술단), 유지숙(향두계놀이보존회), 이희춘(진도북춤보존회), 이승한(고판사), 진미애(진미애국악원) 아리랑전승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김연갑(아리랑연합회), 한영숙(군포아리랑보존회), 남은혜(공주아리랑보존회), 배경숙(경산아리랑보존회), 곽동현(영남아리랑보존회), 이혜솔/김화숙(왕십리아리랑보존회), 유은서(동두천아리랑보존회), 김희은(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 김길자/김진순/서금옥(정선아리랑보존회), 황효숙(울릉도아리랑보존회),조명숙(안성아리랑보존회) (접수순) 사할린 한인협회 권경석(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일반인 김바다, 김한나, 정수현, 김니은, 이이랑, 이도은, 이아리, 노이진, 노아진 만 4세(이이랑)부터 85세까지 동참하여 1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특히,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문경) 이만유 회장과 전 회원들이 마음을 모아 100만원 성금을 보내주었다. (주)국악신문은 국내외 러시아 동포들에게 국악공연 체험, 한복보내기운동, 가훈보내기를 시작하면서 '국악기보내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동안 삼정제빵소 등 여러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서 동포사회에 '평화의 빵 보내기', 김치보내기, 겨울방한구두 등을 보내 오고 있다. 한편 'KBS이웃집 찰스' 방송 제작팀이 장학증서 수상식을 전 과정을 촬영하였는데, 사할린 4세 신마이야 가족을 중심으로 새해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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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2023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통산5회 성료전 국민이 애창하는 ‘문경새재아리랑’를 꿈꾸며 지난 4일 가은읍 소재 ‘문경에코월드’에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가 주관한 금년도 마지막 다섯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대미를 장식했다. 아리랑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애창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민요이다.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며, 나의 노래이면서 너의 노래라고 말하며, 우리 삶 속 희로애락에 따라 때로는 신명풀이로 또는 한풀이로 부르는 노래다.”라고 했다. 그리고 김영임 국악인은"아리랑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담고 있다. 아리랑 첫 소절만 불러도, 절절한 선율이 가슴을 툭 치고, 대한민국 네 글자가 떠오른다.”라고 했다. 이렇듯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韓民族) 가슴과 DNA에 스며있는 우리의 노래다. 이런 아리랑이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할 때 ‘50여 종’이었지만, 그 이후 새로 찾고 생겨 지금은 100여 종에 이른다. 그중에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면서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왜? 무엇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과 확산이 미흡했다. 늦었지만, 우리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가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이고, 추진사업이 4년 차 이어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이다.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문경새재를 넘어갈제/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새재아리랑의 유래가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장가 못 간 노총각이 불렀던 한탄의 노래’이든, ‘문경새재 물박달나무가 대 베어져 나가는 반감과 상실감에서 부르는 노래’이든, 아니면 ‘160여 년 전 경복궁을 중수할 때 부역 나온 장정들이 부모 처자와 이별하고 그리움에 불렀던 아리랑(我離娘)’이든, ‘원납전(願納錢) 내라는 소리에 차라리 귀가 먹기를 바라는 아이롱설(我耳聾說)’이든 조선 사람들은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다. 그것도 ‘문경새재’와 ‘물박달’이란 말이 들어있는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가사나 박자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르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처지가 곧 아리랑이 된다. 그래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조선인은‘즉흥곡의 명수'라며 놀라워했고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도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밥(쌀)이 곧 백성의 하늘이다.” 이라 했었다. 이렇듯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주었듯이 아리랑(정신적 쌀)을 통해 역사 속에서 고난과 애환을 버텨왔고 얼을 이어온 것이 곧 아리랑인 것이다. 올해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는 총 5회, 921명이 참석하였다. 이분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것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사할린동포회’를 찾아가 함께 아리랑을 부른 것이다. 그때 모두 가슴 벅찼고 먼 길이었지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2024년 내년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란 깃발 아래 아리랑을 부르기 위해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최하기로 기획하였는데 아도위 40여 명의 회원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벌써 가슴 부푼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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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 무대 주인이 되는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대성황지난 14일 오후 1시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뒤편 소나무 숲에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 이만유)’가 주관한 2023년도 4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일등 관광지 문경새재에 단풍잎이 서서히 물들어 가는 파란 하늘 아래 관광객들과 함께 부르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울려퍼졌다. 북, 장구, 꽹과리, 징, 가야금, 태평소 등을 들고 맨 ‘한두리국악단’ 단원들이 ‘여는 마당’으로 사물 공연과 쌍북춤을 선보이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이만유 회장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유래와 변천사’에 대한 간단한 이론 강의가 있고 난 뒤 본격적 공연이 시작되었다. ‘문경새재아리랑’을 전 국민에게 보급, 확산하기 위한 자리라는 설명을 듣고 한 관광객은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은 알고 있지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는지를 몰랐다" 며 바쁜 걸음을 멈추고 나누어준 문경아리랑 가사 프린트를 보면서 따라서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홍두깨 방망이는 팔자좋아큰애기 손 끝에 놀아논다문경새재 넘어 갈제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문경은 새재야 참싸리 낭구꼬깜아 꼬지로 다 나가네문경은 새재야 뿌억 싸리는북어야 꼬지로 다 나가네고대광실 높은 집도 나는야 싫어울퉁불퉁 멍석자리 얕은정 주세 고운 한복으로 치장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합창단’과 한두리국악단’이 함께 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상주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등 아리랑연곡을 선사했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을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무대 앞과 주변에 200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흥이 난 관광객들이 손뼉을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추면서 함께하기 시작했으며, 하모니카 연주와 가야금, 해금, 장구춤 공연도 선보였고 사물과 가야금, 해금 반주로 한오백년과 뱃노래를 불렀다. 계속해서 대금산조, 정악 공연이 분위기에 맞게 조용히 감상할 때와 즐거움과 흥겨움을 몸으로 표현할 때, 공연자와 관광객이 한 몸처럼 어울려 모두가 만족하는 공연, 놀이판, 배움터가 되었다. 다음은 열기로 가득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악보가 있는 교육용 유인물을 배포하고 난 뒤, 오늘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을 개최한 목적인 ‘문경새재아리랑 노래 교육’이 진행되었다. 한 소절 한 소절 따라 부르다가 모두가 함께 합창도 하고, 그중에서 열성적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관광객은 특별히 무대 중앙으로 모셨는데, 금방 배운 문경새재아리랑을 어쩌면 그렇게 잘도 부르는지 놀랐고, 그런 분에게는 문경 농특산물을 선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번 4차 교육에는 특별히 ‘다듬이 체험’이 인기를 끌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이 어린 자녀와 함께 많이 참여하였고 남성분들도 참여하는 특이점을 보였다. 마지막 무대 ‘한바탕 어울림’에서는 공연자, 봉사자, 회원, 관광객이 박수를 치며 본조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등을 대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는 아리랑의 주인인 시민과 관광객이 공연 무대에서도 주인이 되는 모두가 만족하는 시간이 되어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만유 회장은 "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각종 문헌에 기록된 ‘문경새재아리랑’의 자료에서 보면 여러 지방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파생시켜 ‘근대 아리랑의 시원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멀지 않아 정선, 진도, 밀양에 못지않은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가 알고 즐겨 부르는 아리랑이 될 때까지 힘쓸 것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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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파사현정(破邪顯正)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2023년 문경시 신년하례회’가 문경문화원 주관으로 올해 1월 3일 온누리스포츠센터에서 각 기관 단체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그때 양재동 향토사연구소장께서‘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2023년 신년경구’를 발표하고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필자가 문경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3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난 뒤 지인들과 함께 문화탐방을 가는 버스에서 전 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는 길이 뭘까 고민하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문경문화원 회원 가입을 권유받고 2004년 회원이 되어 2년 전까지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운영위원, 이사, 감사, 향토사 연구위원, 문경문화유적회 창립 및 초대 회장,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창립 및 초대 회장, 경상감사 교귀행사 주요 역할, 문경새재과거길달빛사랑여행 1회부터 계속 해설 등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문화 가족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한 인연과 활동으로 문경문화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필자는 근래 문경문화원에서 발생한 사건을 신문으로 읽고 경악했다. 입에 담기도 거북한 기사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잘잘못과 진실 여부는 행정과 사법기관이 판단, 처리하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어쩌다 ‘문경문화의 산실’이고, ‘문경의 정신을 담는 그릇’, ‘문경의 혼을 펼치는 마당’이라는 구호를 표방하는 문화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또 이것을 내부적으로 해결치 못하고(행정, 사법, 도의적으로 책임질 사람이나 임원들이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대책 강구 및 수습 등) 언론에 보도될 지경까지 이르러게 되었는가 믿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2021년 11월 26일 문경문화원을 탈퇴하였다. "위의 사람은 문경문화원이 제가 꿈꾸는 문화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통감하며 문경문화원 회원을 탈퇴코자 합니다” 이것은 그때 필자의 회원탈퇴서 내용이다. 필자가 문경문화원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발전되길 바라는데, 왜? 17년간의 긴 세월을 몸담아서 정이던 문화원을 스스로 탈퇴하였을까? 사실 오늘의 이 부끄러운 사태의 씨앗은 이미 2년 전 필자가 회원 탈퇴를 할 그때 뿌려져 있었다. 기울기 시작한 문경문화원을 바르게 세울 기회가 그때였다고, 이번 이 사태가 일어나자, 일부 문화원 가족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내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했고 엎어진 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직전 원장이나 임원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하진 못할 것이다. 누가 어떤 동기나 기회로 직전 원장 12년 임기 동안 ‘문경문화원 이사회 회의록’을 한번 열람해 보시면, 그 당시 필자가 문화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책이나 대안을 제시한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식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이 떠났다. 탈퇴하고 얼마 뒤 어느 인사께서 필자에게 문경문화원의 최근 20여 년의 속속들이 역사는 물론, 명과 암까지 잘 알고 있으며 공정한 판단으로 기록을 남길 사람은 필자밖에 없으니 ‘문경문화원 백서’를 한번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어갔었는데 이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기회를 보아 기록을 남겨 보았으면 한다. 이번 사태는 문경문화원 56년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치욕이라, 필자도 가슴이 먹먹하였지만, 뜻 있는 문화 가족들의 분노는 물론, 오늘날까지 문경문화원의 발전과 위상, 자존감을 지켜오시다 먼저 가신 역대 임원 및 회원들께서 이 참상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서 통탄할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가슴이 아프다. 문제 발생 시점의 문화원 임원 중에는 전직 간부급 직책으로 근무한 공무원 출신이 다수 있다는데 사리 판단이나 책임감이 그리도 없는가?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무얼 했는가? 그리고 무얼 잘했다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계시는가? 참 답답할 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욕을 얻어먹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몇몇 핵심 임원께서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참 엄숙하고 무서운 말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사악(邪惡)하고 그릇된 생각을 깨뜨리고 올바른 도리(道理)를 드러낸다(顯正), 행(行)한다.’라는 이 말을 아무리 눈앞 비루빡에 붙여 놓고 매일 본다 한들 어리석고 못난 사람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다. 우리 문경이 새해 새날에 모두 모여 ‘Yes 문경’을 외치고‘파사현정(破邪顯正)’를 보고 마음에 새겼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입술에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 무슨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그것도 문화를 창달하고 ‘파사와 현정의 쌍두마차가 거침없이 달리는 사회로 서로 믿고 아끼고 사랑하는 밝은 사회로 이어가자고 큰 목소리로 외친 문화원에서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고쳐 쓸 수 없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 문경문화원 원장실 입구 벽에 붙여 놓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족자가 무색하다. 바로 옆 사무실에 계시는 문경 유림단체는 왜 침묵하고 계시나요? 선비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다시 파사(破邪)하고 현정(顯正)의 정신으로 새로운 문경문화원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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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3)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읍 갈평리 마을 입구 삼거리는 이강년 의병장 전적지로, 1907년 10일~11일 양일간에 있었던 갈평전투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갈평리 주민들과 이강년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경모각(景慕閣)을 세웠고, 1979년 관에서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1907년 9월 9일 저녁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이 상초곡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 의진(義陣)을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녁밥을 지어 왔다. 이강년은 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모두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지냈다. 9월 10일 새벽 일찍 하초곡을 거쳐 요성으로 부대를 옮겨 주둔하고 있을 때 갈평 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척후병의 급보에 의하면 어젯밤 갈평리로 들어간 조동교, 김현규 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의병이 대패하였으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인명 피해가 크며 갈평마을은 왜군이 불러 질러 화염이 치솟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진군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정세를 살펴보니 수백 명의 일본군이 있었으나 달아난 의병을 추격하거나 마을에 숨어 있는 의병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져 있고 갈평 냇가에는 본진 50여 명, 1개소대 병력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점심 취사 준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기 의병의 주된 전술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대세였다. 운강 이강년은 기습작전을 펴기로 하고 제장(諸將)을 불러 사방으로 분산, 적의 주둔지 가까이 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내가 총을 쏘면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사방에서 기습당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일부는 총을 들고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도망가기 바빴다. 이렇게 하여 조동교, 김현규 의병부대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 본진 1개 소대를 궤멸시키고(적 8명을 생포 및 사살)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갈평전투는 의병 전투사에 빛나는 큰 성과였다. 이어서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신태원 후군장 등 아군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한 후 예천 명봉사에 머물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향했다. 9월 25일 영춘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12일 괴산 연풍전투에서 일본 수송대를 급습하였으며, 10월 22일 원주 유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4차에 걸친 죽령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 및 격퇴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세 불리로 단양 영춘으로 퇴각한 뒤 신돌석부대와 합진하여 순흥을 공격하여 일본군 퇴각시켰다. 다시 11월 26부터 12월 25일까지 충북 단양 일대에서 유치전투, 백자동전투, 영춘궁동전투, 복상동전투, 월계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12월 말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식무기와 탄약을 가진 정예 군인 3천 명이 합류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908년 1월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총대장으로 경기도 여주 출신이며 문경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해 오다 거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진공 작전에 돌입했으나, 효(孝)란 절대 가치를 가진 유림으로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 역할을 맡은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인 선산 출신 왕산 허위(許蔿)는 동대문 밖 30리(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비록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은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켜 일제에 대항,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때 운강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운강 이강년은 해가 바뀐 1908년에도 변함없이 항전하였는데, 1월 6일 경기도 동북부 낭천전투를 비롯해서 3월 28일까지 가평 건천전투와 용소동전투, 대청동전투, 포천 청계전투에 임했으며,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 강릉 하사동전투와 사동전투, 홍천 북면전투, 양양 백사장전투를 계속하였다. 5월 16일에는 경북 북부 봉화 서벽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다시 6월 4일 봉화 내성전투, 6월 10일 봉화 재산전투, 6월 21일 제천 오미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많은 전투 중에 ‘봉화 서벽전투’에서 이강년이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민들이 뜻을 모아1984년 12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항일의거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늘도 무심하지! 강원도·충청도·경북 일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셨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13년(1896년∼1908년)간의 의병 투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청풍군 금수산 ‘작성산(鵲城山)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셨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일본군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한탄하기를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또 옥중에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시를 남겼다. 의병장 이강년은 왕손으로서, 선비로서, 의병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며 면회 온 아들에게 구차하게 "살려 달라 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이강년 선생은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음력 1908. 9. 19)51세를 일기로 의기에 찬 일생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니 하늘도 산천도 슬피 울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에 출빈(出殯-임시 운구 안치)되었다가 나중에(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후 다시(1944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강년 선생의 순국 후에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호국 인물인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최영, 강감찬, 이순신, 김종서, 권율, 곽재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22분과 함께 흉상으로 모셔져 있다. 이번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순례’ 중에 ‘애국과 의병정신’이란 주제를 두고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소개하면,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유구곡 제9곡 옥석대(玉蕮臺)에 학천정(鶴泉亭)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鶴泉(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의 옆에는 글의 주인인 듯한 이름으로 李完用(이완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강년과 이완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강년과 이완용은 1858년생 동갑이다. 이강년은 22세에 무과(고종 17년-1880년)에 급제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중년인 51세(1858∼190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전기한 바와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흉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완용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신으로 부귀영화와 노년인 69세(1858∼1926)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을사오적,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학생 여러분은 누가 참삶을 산 인간 승리자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문경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84인이 계신다. 그래서 문경은 ‘의병과 독립운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문경 출신 역사 인물 중에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치신 분이 많이 계신 반면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에 찬성하는 등 친일 매국을 하고 조국의 젊은 청년들을 희생물로 하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제물이 되도록 하여‘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문경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도 있다. 이번 3박 4일 일정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맺음말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순례길에는 이강년 의병대장 외에 이름이 알려진 의병은 물론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혼이 살아 있는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힘든 산악길을 걷는 의미는 고난의 세월을 살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들을 기리며, 세계 유일 분단국가로서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언제든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다 같이 의병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지난 2018년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자작시인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란 추모 헌시를 낭독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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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2)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유격장으로 임명된 후 잠시 휴식을 취할 사이도 없이 전투에 임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수안보와 문경 전투는 그쪽 지리를 잘 아는 내가 적격자라며 이강년이 자원하여 수안보와 문경 전투에 투입되었다. 수안보에 있는 일본 병참기지와 무기고를 공격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대 임무를 띠고 6초(哨-600명, 1초는 100명)의 의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제천을 떠나 1896년 3월 19일 수안보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일본군의 방비가 예상외로 튼튼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다시 전열을 강화 9초의 병력을 이끌고 문경으로 이동했다. 3월 25일부터 4월 20일까지 문경 조령 지역에 주둔하면서, 먼저 상주 함창 태봉 병참기지를 치기 위해 평천에 주둔하고 있는 서상열 의진을 간접 지원하고, 중군장 윤기영과 함께 조령전투에 임해 일본군 군기고를 공격하여 무기와 탄약, 유황 등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리면서 조령을 완전하게 장악하여 일본군 병력 및 군수품 이동을 차단하였다. 이때 조령에서 멀지 않은 완장리에 집이 있었으나 가지 않았으며, 부인 김 씨로부터 편지가 왔지만 읽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승재가 "어머님 편지인데 한 번 보시지요” 했는데도 보지 않고 불태웠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창의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데 집안일에 신경을 쓰거나 사사로이 정에 치우치면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며 장부다운 모습을 보였다. 4월 20일 제천 본진에 복귀하였다. 그 후 5월 23일부터 3일간 제천전투를 시작으로 단양, 원주 등에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의병의 피해가 극심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호좌의진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의암 유인석 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요동에 있는 동포들과 힘을 키워 재기하겠다며 운강도 군사를 해산하고 요동으로 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8월 23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때 운강 이강년의 수하에 남아 있는 의병의 숫자는 1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이강년은 아들 승재와 고향 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왜군과 관군이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다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나 여건이 여의찮아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내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과 싸울 것이오” 하고 그해 7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단양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때를 기다리며 단양 금채동에 은신, 학문에 몰두하면서 다시 재기할 때 전투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며 지냈다. 이때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정미의병 때 실전에 활용하여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 있었다면, 한 말 의병전에는 '속오작대도'가 있었다.”라며 그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의병 이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일제가 노골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고,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하고, 행정ㆍ사법 사무를 통감부의 감독 아래에 두는 정미칠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자행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구국 항일 무력전이 전개되는 1907∼1910년간에 걸쳐 투쟁하는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시작되었다. 이에 운강 이강년 의병장도 분노하여 1907년 3월 유인석과 제천과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再擧義)하고 5월에 의진을 재편성하여원주 배양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7월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임해 해산된 군인을 소집하고 원주로 진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다량 확보하여 8월 15일 제천전투에서 민긍호 의진과 연합작전으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월 19일 영월 주천 강가에서 40여 의진이 결집, 이강년은 호서의병대장에 추대되고 난 뒤 8월 23일 충주성을 공격 후 단양과 예천 상리 명봉사를 지나 문경으로 진군하였다. 9월 초 문경 동로 노은3리에 주둔하여 군사를 추가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산북 김용사로 이동 주둔할 때 각 처의 의병장 휘하 1,500명의 의병이 문경으로 집결하였다. 9월 7일 문경읍을 장악하고 신현리 고모산성에 주둔하여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고모산성에는 후군장 신태원을, 이화령은 좌익장 김영식과 참모 이정래를, 하늘재는 좌익장 천보락에게 각각 방어토록 하였으며 9월 9일 조령전투, 9월 10일, 11일 이틀간에 걸쳐 갈평전투, 9월 14일에는 적성전투를 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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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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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경새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의 만남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주말 11일 문경 시민들이 사할린동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양주를 찾아갔다. '아리랑도시 문경’을 알리고‘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를 위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 이만유)’가 주관, 개최한 올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열렸다. 아도위 회원 34명이 이른 아침 문경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이렇게 먼 곳 양주를 찾아간 연유는, 2014년 사할린 귀국 동포 101명(현재 95명)이 양주시에 새 둥지를 틀어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고, 문경새재아리랑의 확산을 위함이었다. 율정마을 ‘양주시 사할린동포회(회장 : 김정희)’와는 이미 몇 차례 우리와 만난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2018년‘디아스포라 아리랑제’가 열렸을 때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서 아도위가 주관한 고유제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어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도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와 러일중 동포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했다. 이 당시 이 분들도 함께 무대에서, 광장에서 만났다. 당시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이름으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양주시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직전 회장, '카레이스키아리랑'(카레이스키는 러시아어로 ‘고려인’을 의미)을 창작하신 김세르게이 작곡가,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최나타샤(최미분)단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 의정부 전호열 아리랑 애호가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고 축사 및 격려사를 해 주셨다. 먼저 이만유 위원장이, 오늘 ‘양주시 사할린동포회’를 찾아와 여러분과 함께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열게 되어 반갑고, 이 만남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며,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이 역사가 오래되어‘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하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아리랑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 민간인들이 뭉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시키기 위해, 지난 2017년 아도위를 창립, 아리랑학교 등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근래 인지도가 높아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을 주목하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편곡하고, 여러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 모쪼록, 오늘 아리랑학교가 끝날 때까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이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창작 발표하여 아리랑으로 코로나를 물리치자는 노래를 널리 알렸다"고 격려해 주었다. 직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으며, 오늘 이렇게 사할린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아도위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은 "지금까지 양주사할린동포회와 문경시민들과는 7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신 아도위에 감사한다"고 하였으며,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도위가 받은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어서 신현국 문경시장(함광식 문화관광농업국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 ‘문경새재아리랑 소리꾼 송영철과 만남’과 문경오미자 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위원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이날 아도위 황동철 이사의 사회로 시작한 아리랑학교는 식전행사로 ‘한두리국악단(단장:함수호)’의 여는 마당, 사물과 태평소(함수호: 쇠, 유대상: 설장고, 김원섭: 북, 이성자: 징, 김경숙: 태평소)의 풍물 공연으로 이날의 행사를 축하했다. 이어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 최미분) 20명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 반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합창단(단장:박순자)의 ‘아리랑연곡(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축하 공연이 있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아도위 창작곡인 이만유 작사 함수호 작곡의 ‘코로나아리랑’과 권순애 작사 함수호 작곡 ‘풍년아리랑’공연이 있었으며,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이고,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이야기’란 주제로 이만유 위원장이의 특강으로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아리랑의 기원과 유래, 어원은 무엇일까?,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사에서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이춘자・전정남・안복수 위원의 지도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으며, 안복수・이성자・김금옥 위원의 ‘다듬이 공연 및 체험’, 곽말득・신준식・조홍자 위원의 ‘하모니카 공연’, 가야금 함수호・해금 이기옥・장고 김경숙 국악인의 ‘가야금 합주’, 김영애・정행복 위원의 ‘신나는 가요 공연’, 정송위・김옥화(후) 위원의 ‘뱃노래’, 전정남・김옥화(선)・박춘자 위원의 ‘우리 비나리’, 사물놀이에는 쇠 함수호・설장구 유대상・북 김원섭・징 이성자, 태평소 김경숙의 멋진 공연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함께하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날 공연 총괄 지휘는 함수호 단장, 행사의 모든 기록(사진, 동영상)은 오석윤 감사가 수행하였다. 이상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아도위가 준비한 떡과 수박, 오미자 와인 등과 사할린 동포께서 직접 구운 러시아식 빵과 차를 들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 아도위 회원들은 대한민국 아리랑사에 또 하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가슴 뿌듯하게 ‘아리랑도시 문경’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아니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그날까지 문경새재아리랑의 전도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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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 얼쑤!지난 11일 오후 2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사할린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문경시민 40여 명이 양주사할린동포회(회장:김정희)를 찾아서 아리랑으로 동포애를 나누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이만유, 아도위)가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일환으로 10년 전 사할린에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양주사할린동포회를 찾았다. 양주 사할린 동포들은 2018년부터 문경시민들과 문경(2번). 광화문광장, 사할린(3번), 정선 등에서 7번을 만났다. 특히 2018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 현지 사할린공연단(단장:이진선) 35여 명이 초청되었을 때, 당시 문경시민들과 문경새재에 올라서 '아리랑고유제'(제사장:이만유)에도 함께 참가했다. 당시 2018문경새재아리랑제 주제곡 '카레이스키 아리랑'의 작곡가 김세르게이 선생이 사는 곳이 양주 율정마을이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의 배우자이다. 지난날 문경시민들과 사할린 동포들의 만남을 헤아려볼 때 이번 행사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매년 양주 사할린 동포에게 문경사과를 보내주는 익명의 회원도 있다. 환영 축하 공연으로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미분 회장과 회원 20명이 사할린아리랑을 선사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 합창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기미양 국악신문 대표이사,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축사를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최근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의 초청으로 파주사할린동포회원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에서 개최한 '통일아리랑평화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불렀다는 노래가 아리랑이고,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 기록에도 서민과 왕이 같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처음 들어본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늘 부모님이 일하실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서 따라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사람들이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라고 소감과 함께 축사를 전했습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담론이 횡행하지만, 오늘 사할린 동포를 대표하는 권경석 회장에게 감사장을 받는 두 단체의 활발한 전승활동 사례를 들어 자랑 좀 하겠습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 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입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정선, 진도, 밀양에 이어 사할린을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실행을 못하고 해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하려고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창조성'을 주목하는 아리랑의 속성에 주목하여 왕십리아리랑을 창작. 보급에 성공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창작아리랑의 창출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어느 고을이든 공동체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할리아리랑보존회도 전승단체로서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건립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양주 사할린 동포는 해외 전승단체로 2018년 문경 디아스포라 아리랑 축제에서, 매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 지난해 12월 정선에 세운 유네스코아리랑비건립식에도 동행해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김세르게이 작곡가와 사할린아리랑보존회가 살고 계시는 양주 율정마을을 아리랑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 오늘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여러분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3년간 임기를 마치고 3개월 전 귀국한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넙죽 바닥에 엎드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 방식의 큰절을 올렸다.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모두가 갑자기 가슴이 울컥 숙원해졌다. 이어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그리운 동포들이 살고 있는 사할린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톡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만 올 수 있고, 부모가 사망하면 2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히나 전쟁으로 4년이나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문경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과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공로상을 수여했다. 아도위 이만유 위원장은 "오늘 행사는 우리 아도위가 '새로운 아리랑 역사를 쓴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대일항쟁기 이후 70여 년 동안 사할린에 억류된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니, 매년 문경새재아리랑제와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문경에 방문을 할 수 있는 방향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공로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혜솔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 이후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들과 힘이 닿는 날까지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전수교육,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에도 앞장 서겠습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신현국 문경시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시가 보낸 문경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과 문경오미자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회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식전 행사를 마치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이 환영사에서 "코로나가 오기 전 양주사할린동포회는 그동안 문경시민들과는 7번을 만났다. 2018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2019문경찻사발축제에 초청되어 2번이나 문경을 방문했고,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가 열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고윤환 문경시장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광화문 광장)에서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전승 단체들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오늘 이렇게 먼길을 찾아주신 문경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지난 2018년 12월 아리랑연합회에서 관광버스를 보내 주어서 우리 양주 사할린 동포들이 양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통일아리랑축제'에서 북한, 중국, 일본 동포들이 부르는 여러 아리랑을 처음 들었다. 이후 사할린합창단을 만들어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어서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제1부에서 아도위 문경시민들이 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이 이어서 연곡으로 소개되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함수호 단장이 작곡한 창작아리랑 풍년아리랑, 코로나아리랑을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힘차게 선보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였다. 이어서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이춘자, 전정남, 안복수 회원이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춘자 강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못하는 동포들이 금방 따라서 부르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문경아리랑을 배운 동포 중 이영헌씨는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나가보자고 하며 언제냐"고 물어본다. 문경아리랑을 따라서 부르면서 신명이 나서 어깨춤도 추었다. 한편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은 작년 대구아리랑경창대회에 동영상을 보내는 비대면 심사에 출전해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행사를 마치고 양주에서 직접 구운 빵과 차를 준비한 다과회에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문경에서는 떡과 수박, 문경오미자 와인을 준비해서 내놓았다. 오후 6시 아도위 회원들은 동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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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호국보훈의 달’ 6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먼저 가신 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고자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進軍路)문경 구간 도보 순례’를 하였다. 지난 6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문경YMCA’와 ‘아리솔지역아동센터’ 주관으로 학생 26명, 지도 교사, 향토연구사 등 38명이 참가했다. 의병 활동 지역이 산악지대라 위험 구간은 조령산악구조대 10명이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도와주셨고, 차가 다니는 도로 구간은 문경경찰서 관할 지구대 파출소의 경찰차로 에스코트하여 주셨다. 이렇게 장장 41.3km를 도보 순례를 하면서 운강 이강년 의병 대장의 흔적을 찾아 학생들과 함께 창의한 ‘도태장터’와 피 흘려 싸워 승리한 ‘갈평전투’ 등 곳곳의 전투 현장을 찾아갈 때 문화관광해설사, 향토연구사들과 함께 필자는 4일간 동행하며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해설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급하면 의병이 활동하여 구국운동을 펼쳤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국가 부흥 운동’에서부터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시대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이곳저곳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임진왜란 때는 고을 수령이나 관리들이 도망갔지만, 오히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백성들이 창의(倡義)하여 저항하였다. 당시 왜군이 조선의 약한 군사력을 파악하고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오산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민초들의 의병 활동으로 곤경에 처했다. 또 일본은 대장이 죽으면 오합지졸이 되고 해산하게 되는데 우리 민족은 대장이 죽으면 또 다른 대장이 뒤를 이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우리 민족만의 특성이 있다. 일본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 위에서 구경하다 전투에서 이기면 세금 내고 복종한다는데, 우리 민족은 신분을 떠나 너도나도 직접 목숨 걸고 싸운다. 때로는 의병이 관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용감하게 싸웠다. 운강 이강년은 1859년 2월 19일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도태마을에서 조선 세 번째 왕인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 19세 손으로 출생하였다. 이강년 어머니께서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출생 시 도태마을 앞 둔덕산이 3번 울었다고 하였다. 이는 비범한 인물이 출생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보았다. 1880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게 참여하였으며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의병장 유인석 등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한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운강 이강년도 선비이고 왕가의 후손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사들을 모집하였고 가은 도태 장터에서 거의(擧義)하였다. 처음에는 문중, 포수, 농민 등 60여 명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의병에게 참여하겠다면서 300여 명이 합세하고, 거의 한지 이틀째인 2월 25일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반역 행위자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을 체포하여 구 농암장터 ‘개바위’에서 효수(梟首)하였다. 그랬더니 유생과 농민 등이 찾아와 의병이 되겠다고 하여 600여 명의 의진(義陣)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서 2월 26일 상주 함창 태봉과 충북 수안보 병참기지를 연결하는 중요 노선인 고모산성에 부대를 주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함창 태봉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2월 27일 충주의진과 합공작전을 계획했으나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충주의진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모젤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하게 되었다. 이 ‘고모산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은 큰 상처를입게 되었다. 의병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구식 화기인 화승총이나 화살로 대응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때 인근 마을과 주막거리가 불탔는데 지금 돌고개 성황당 앞에는 타다 남은 느티나무가 반쪽이 타서 속살을 드러낸 채 서 있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운강 이강년은 ‘고모산성 전투’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3월 12일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고 합진(合陣)한 뒤 유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실천에 옮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하나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 유학자로서 선비들 중심으로 조직된 의진으로 전투력이 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무장 출신 이강년과의 합진은 유인석이 고무(鼓舞)되고 호좌의진을 더욱 튼튼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강년 의병장을 반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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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과거시험 병폐와 커닝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새재는 ‘과거(過去)길’인가 ‘과거(科擧)길’인가?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 과거길’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답은 둘 다 맞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란 사설로 부르는 ‘아리랑고개’이기도 한 문경새재는 문경문화의 보고(寶庫)로서,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옛길이라 600여 년의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과거(過去)길’이다. 문경(聞慶)이란 지명은 ‘들을 문(聞)’과‘경사 경(慶)’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의 좋은 기운을 받아 장원급제란 꿈을 이루기 위해 추풍령이나 죽령보다는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로 넘어가길 원했다. 그러니 문경새재는 당연히 ‘과거(科擧)길’이다. * 표석은 ‘과거(科擧)길’란 의미로 세워졌음.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과 제3관문 조령관 사이, 옛날에 박석(薄石)이 깔려있었던 조금 가파른 구간이 있는데 여기를 ‘장원급제길’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과거 합격을 기원하는 ‘책바위’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 ‘초점(草岾)’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길을 ‘금의환향길’로도 부르고 있는데,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갈 때는 ‘장원급제길’이 되고 급제한 후 왕이 내린 합격증(홍패)을 지니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내려올 때는 ‘금의환향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式年試) 문과(대과)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행하며 최종 33명을 뽑는다. 그 외 부정기적으로 임금이 즉위할 때 보는 증광시(增廣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別試),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다 하나 개인의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광이 되는 과거시험에 모두가 목을 매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급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러다 보니 사실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절망과 좌절, 실의에 빠져 낙향하면서 넘었던 수많은 선비의 애환이 쌓인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고, 시에 능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다는 유우잠(1575~1635)이란 훌륭한 선비는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을까? 그 심정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이렇게 과거시험 합격은 어렵다. 조선 시대 때는 음서(蔭敍) 제도가 있어 과거 급제를 하지 않고도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 있지만, 조선 시대 유일한 공식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 큰 노력은 물론,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어떻게든 합격하겠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결국 부정행위까지 하게 된다. 과거시험 글제인 시제(試題)에 따라 그동안 공부한 지식으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기술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일종의 표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다고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병폐와 기발한 커닝 또한 빈번히 자행되었다. 한 예로, 과거시험 부정 중에서 아주 악질적인 것은 관리를 매수하여 과거 답안지인 시권(試券)에 수험생과 4조(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름 등 인적 사항을 적는 앞부분과 제술(製述)한 본문이 있는데 절차상 이를 분할하고 채점이 끝나면 다시 원상태로 붙이는데 그때 자기의 인적 사항을 합격 답안지에 붙이게 하여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적과(賊科)라는 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과거 시험장 분위기와 다양한 커닝 방법을 살펴보면, 수험생들은 옆 사람 것을 훔쳐보지 못하게 각각 6자(약 1.8m) 거리를 두었으며, 시험장의 좋은 자리로는 시험관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였다는데 이는 미리 준비한 쪽지 등을 감독관 몰래 슬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커닝 방법으로는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은 약과이고, 수진본(袖珍本)이라는 좁쌀책을 가지고 가는 것과 도포 자락 안쪽에 빼곡히 사서오경예상 답안을 써온 사람, 대리시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외부로부터 쪽지를 건네받는 사람, 붓두껍에 깨알 글씨로 작성한 예상 답안을 숨긴 사람, 콧구멍에 종이쪽지를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관을 뇌물로 매수하거나, 남의 글을 베끼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빌어 제출하는 차술(借述)이라는 행위도 있었다. 이렇게 커닝하다 적발되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시험장 안에서 책이나 문서를 가진 자가 발견되면 향후 2식년(2차례, 6년) 동안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한다. 남의 제술(製述)을 빌리는 차술(借述)이나 남을 위하여 제술해 주는 대술(代述)을 한 자는 곤장(杖) 100대에 도형(徒刑-징역) 3년의 중형을 주고, 영조 때 차술·대술의 형벌을 더 강화하여 조정의 관료나 생원·진사이면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유학이면 수군으로 삼았다. 낙방거자(落榜擧子)/ 이만유 괴나리봇짐 메고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난 한양간 과객 돌아오는 길 삐딱이 쓴 해진 갓 축 처진 어깨 꼬질한 도포 자락 문경새재 노송은 알고 있다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사연을 간절한 염원을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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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4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했던 장승은 지명이나 속담, 수수께끼, 전설, 설화는 물론이고, 문화재, 문학작품 속에서도 남아 있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으로 장승배기, 장승거리, 장승방, 장승리, 장생포, 미륵리, 법수리, 법수배기, 벅수재 같은 지명은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고 우리 지역에도 옛 영남대로변에 있는 공평동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장승 관련 지명은 전국에 771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그날그날 날삯을 받고 일을 할 때는 시간만 보내려고 장승처럼 서 있고 도급(돗내기)에는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날 일에 장승이고 도급 일에는 귀신이다.’, 주되는 목적과는 상관없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짐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 억지로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이권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 ‘장승 입에다 밀가루 발라 놓고 국숫값 내라고 한다.’거나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 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하고, 멋모르고 함부로 나대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두고 ‘구 척 장승 같다.’라고 놀리는 말도 있다. 또 어떤 일을 하다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대책도 없이 그만두면 ‘벅수같이 자빠진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을 ‘벅수같이 멍하니 서 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벅수를 넘든가 뱅뱅이를 돌든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등 많은 속담이 있다. 그리고 수수께끼로는 ‘밤낮으로 눈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입이 크되 말 못 하는 것이 무엇이냐?’ 등이 있다. 장승에 관한 설화로는 장승을 치죄(治罪)하여 도둑을 잡은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가 있고,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고, 문화재로는 통도사의 ‘국장생석표’가 보물 제74호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장승은 ‘충무시 문화동 벅수(제7호)’, ‘통영 삼덕리 벅수(제9호)’, ‘나주 불회사 석장승(제11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제15호)’, ‘부안 서문안 장승(제18호)’과‘동문안 장승(제19호)’, ‘남원 서천리 석장승(제20호)’, ‘순창 충신리 장승(제101호)’, ‘순창 남계리 장승(제102호)’ 등이 있다. 1970년까지 조사된 장승 유적지로는 200여 개소 있었다. 장승은 또 힘없는 민초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무엇이든 이루어 주는 해결사였다.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장승에게 빌면 아이를 잉태시켜 주고, 반대로 어쩌다 부정한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갉아서 감초와 섞어 삶아 먹으면 낙태한다는 비방약이 되는 양면성을 가지기도 하며 풍년, 풍어, 건강 등 소원성취를 해 주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다. 일명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이다. 함양군청 자료에 의하면,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춘이월 반쯤 핀 복숭아꽃이었다. 옥빈(玉鬢)에 보조개, 초생(初生)에 지는 달빛이 눈썹 사이에 어리었다. 앵두처럼 고운 입술은 당채(唐彩) 주홍필로 찍은 듯하고 버드나무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하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것이 서시(西施)와 포사(褒姒)라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주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까닭에 상부(喪夫)를 한 것이 징글징글하게 많아 팔자가 센 여자였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었고 열여섯 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죽었다. 열일곱과 열여덟에 얻은 남편은 용천병과 벼락으로 각각 죽었다. 열아홉, 스무 살에 얻은 서방도 급살로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씩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 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 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아내자고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양 도민이 합세하여 그녀를 서도에서 쫓아내었다. 옹녀는 남쪽으로 가다가 청석관에서 홀아비 변강쇠와 만났다. 그들은 서로 만나 말 몇 마디에 뜻이 맞아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치렀는데 대낮에 연놈이 벌거벗고 익숙한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양골(陽骨)인 강쇠놈이 옹녀의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옥문관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읊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빨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는지 언덕지게 패이었다. 콩밭 농사지었는데 듬북꽃이 비치었구나. 도끼날을 맞았는지 금 바르게 터져 있네, 생수처 온답(溫畓)인지 물이 항상 고이었다. 무슨 말을 할려고 옴질옴질하는 건지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빼어 물었으며 곶감을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 물렸고 만첩산중 으름인지 스스로 잘도 벌어졌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고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절로 난다. 제 무엇이 즐거운지 반쯤 웃고 있구나. 곶감 있고 연계 있고 조개 있어 제사상은 걱정 없다” 옹녀가 반소(半笑)하고 갚음을 하느라고 변강쇠의 기물을 어루만지며 한 가닥 곡조를 빼어 읊었다.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전배사령(前培伺令) 서렸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군노(軍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가 웬일인가, 성정(性情)도 혹독하여 화가 나면 눈물 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괴였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궁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인사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있다. 물방아 절구대며 쇠고삐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애를 써서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 때 변강쇠는 낫부림 넉장기, 갑사꼬리 여사하기, 미골 지패 퇴기질, 호흥호백 쌍육치기, 장군 멍군 장기 두기, 맞춰 먹기 돈치기와 불러먹기 주먹질 고패 떼기 윷놀이와 안집 뒷집 고누두기, 의복 전당 술 먹기와 남의 싸움 가로막기, 강새암 계집치기, 밤낮으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이에 옹녀는 변강쇠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하고 동반살이 하다가는 돈 모으기는 고사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깊은 산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전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터요, 강짜도 않을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그리하여 그들이 들어간 산이 지리산이다. 변강쇠는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애끓게 하소연하다 나무라도 해 오라 했다. 변강쇠는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청에 따라 지게를 지고 담뱃대를 물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게으른 강쇠가 산에서 낮잠을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땐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고 이슬이 내리었다. "요새 해가 왜 그리 짧은가, 빈 지게 지고 가면 계집년이 방정 떨리.” 사면을 둘러보니 마천가는 길에 장승이 하나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 "벌목 정정 애 아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불로소득 좋을시고” 지게를 찾아지고 장승 선 곳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며 "네 이놈, 누구 앞에 색기하여 눈망울을 부릅뜨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 마천 파시평과 사당놀음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때 후취덜미 가리딴죽 열두권법 범강장달 허네라도 다들 앞에 떨어지니 수족 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우댓군 소리하며 제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를 장히 편다. "집안사람 거기 있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 뜰 가운데 턱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니 강쇠 계집 반기느라 손목 잡고 어깨 주무르며, "어찌하여 그리 저물었나. 평생 처음 나무하러 가서 오죽이나 애썼겠는가, 시장한 데 밥이나 자시오” 방안에 불 켜놓고 밥상 차려 드린 후에 장작나무 구경차 불 켜 들고 나와 보니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었는데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춰 입고 방울눈에 주먹코 채수염이 점잖았다. 여인이 뒤로 팍 주저앉으며, "애고, 이게 웬일인가 나무를 하러 간다더니 장승을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장승을 빼어 땐단 말을 언문책 잔주에도 없는 말, 만일 패어 땐다면 목신동통 조왕동증 목숨 보존 못 할 테니 어서 지고 가서 제 자리에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오소” "가장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계집이 요망하게 그것이 웬 소린고. 나무 깎은 장승 인형을 패어 땐들 무슨 관계있나. 망할 말 다시는 하지 말라.” 강쇠는 밥상을 물린 후에 도끼로 장승을 패서 군불을 놓고 유정부처 홀딱 벗고 사랑가를 불러가며 개폐문(開閉門) 절판례(絶版禮)를 멋지게 하였다. 이때 장생목신 무죄하게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 속에 탄 재가 오죽이나 원통할 것인가. 의지할 곳 없이 중천에 떠서 울렴.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갚겠다. 대방전에 찾아가서 이 원정 하소연하오리다. 노들 선창목에 대방장승 찾아가서 문안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니 대방 크게 놀라 "이 변이 큰 변이라.” 하고는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作破) 화장하였으니 이놈 죄를 물어 벌하고자 하니 금월 초사흘 삼경에 노들선창으로 일제 취회하여 함양 동관 조상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하여 주옵소서.” 하고 팔도 장승에게 통문을 냈다. 귀신의 조화라 오죽 빨리 전했겠는가. 조선의 장승 하나도 빠짐없이 기약한 밤에 다 모여 새남터 배게 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였다. "통문사를 보았으면 모든 뜻을 알 터이니 변강쇠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꼬?”"교수형에 처합시다”"불로 태워 죽입시다.”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그놈을 쉬이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 터이니 고생을 실컷 시킨 후에 죽이되 열아흐레 동안 장승 화장한 죄인 줄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터이니 우리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 내외 없이 벽에 도배하듯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하오” 대방이 그 말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히 좋소, 그대로 시행하되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라 경상 차지하고 오장육부 내장일랑 경기 충청 차지하며 팔만사천 털구멍도 빈틈없이 병을 단단히 잘 발라라” 이렇게 하여 변강쇠는 조선에 있는 모든 장승이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병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봉사를 데려와 점을 치고 명의를 데리고 오지만 치료가 불가하였다. 결국, 변강쇠는 죽고 말았다. 옹녀는 강쇠의 초상을 치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고자 하였다. 먼저 중이었다. 그러나 변강쇠의 시체를 만지자마자 그만 죽고 말았다. 초라니 풍각쟁이 마종 떱뜩이들도 옹녀의 새 남편이 되기 위해 변강쇠를 초상 치르려고 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이상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지만, 변강쇠전은 겉으로 보면 남녀 간의 색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외설적인 작품으로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하층민들의 비극적 생활상과 종교관, 내세관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전설로서의 이 변강쇠전은 무분별한 성문화를 응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문란해진 성 문화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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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3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장승은 우리가 집단으로 삶을 영위했던 전통마을의 대표적인 공동체 신앙물로써 마을 또는 절 입구나 길가에 세워 둔 사람 머리 모양을 조각한 기둥으로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 등이 있다. 장승의 유래와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남근숭배에서 나온 것, 고려 시대 재화를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불교 행사나 사찰 보수, 그리고 병자나 빈민을 구제하는 데 쓰기 위해 사찰에서 설치한 금융기관이었던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목장승은 부족국가 시대의 솟대(소도-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입석-立石]에서, 돌무더기로 만든 제당(祭堂)의 하나인 누석단(累石壇)에서 비롯되었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 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을 가졌다. 장승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과 지역의 경계표 구실과 길가에 장승을 세워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몇 리가 떨어졌고 이웃 고을 이름이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어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및 이정표 구실도 했으며,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과 개인의 소원성취(득남, 풍년, 풍어, 건강)를 기원하기도 했는데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里程) 표시는 없으며 ‘천하대장군’ 등의 표시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신물(神物)로 인정하며 동제(洞祭)의 주신 또는 하위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는 장승에게 빌거나 제사를 지내 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생김새는 인면형(人面形), 귀면형(鬼面形), 미륵형(彌勒形), 남근형(男根形), 문무관형(文武官形) 등으로 나뉜다. 인면형의 경우 남장승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덧니와 수염을 단 형상이며, 더러는 몸체가 붉게 채색되기도 한다. 반면 여장승은 관이 없고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귀면형은 왕방울 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미륵형은 불상(佛像)과는 달리 꾸밈이 없이 수수하며 자비스럽고 친밀감이 있다. 이 밖에도 석비형, 입석형, 석적형 등이 있다. 장승의 모양은 장소에 따라 채색, 형상, 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얼굴을 아주 무섭고 험악하게 만든 이유는 염병, 마마 등 병귀나 액귀(厄鬼)를 쫓아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장승의 명문(銘文)으로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주류지만,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의 방위 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소대장(受昭大將) 등의 호법 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裨補) 장승류, 두창(痘瘡) 장승류 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장승 본연의 기능도 변하였고 명문도 다양화되었다. 마을 이름이나 안내판 또는 전시물, 장식물,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과 신앙체로서 시국 장승을 깎아 세웠고 명문은 ‘민족통일 대장군’, ‘백두대장군, 한라여장군’ 등이 있으며 지리산 노고단과 문경새재, 계룡산 등지에 ‘민족통일 대장군, 평화통일 여장군’을 세웠다. 이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고 마을과 국가의 단결을 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지는 장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중 ‘장승이 마련해 준 삼백 냥’이라는 이야기는 박문수 어사 행장기 중 하나로 전해지는 작가 미상의 이야기인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 모양새를 하고 여기저기 팔도를 돌아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었는데, 봉놋방에 들어가 보니 웬 거지가 큰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본체만체하고,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튿날 아침 거지가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 게 어떻겠소?” 하고 말을 거니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꼴이라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짐짓 "좋소, 그럽시다”하고는 그날부터 둘이 이곳저곳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마을 큰 기와집으로 썩 들어선 거지가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두말 말고,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 깔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소”라고 하였다. 여인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이 집 남편은 아들 둘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자, 비를 피하기 위해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 아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어서 내려가자.” 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내려오는데 뒤에서 큰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 사정을 듣고 거지에게 절을 열두 번도 더 하면서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내 재산을 다 달라고 해도 내놓으리다” "아,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후 어떤 마을로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는 망설임 없이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하니 "우리 집에 7대 독자 귀한 아들이 지금 병이 들어 다 죽어갑니다”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서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저기 바람벽에서 흙을 한 줌 떼어 오시오” 하더니 동글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환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금방 말짱해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 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 대로 드리리다.” "아,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또 백 냥을 받아서는 다시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거요.”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깨나 하는 집에서 상을 당해 장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는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하나?”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그래,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베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 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송장 든 관이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석 자 세 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곳을 파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명당인데 도둑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묫자리를 이렇게 잘 보아주셨으니 우리 재산을 달란 대로 다 내놓겠습니다.” "아,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약속대로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 냥을 받았다. 그리곤 역시 박문수를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어느 날 첩첩산중이라 한참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거지가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이별해야 하겠소” "아,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고는 거지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 하나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구원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꼭 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처녀에게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빌고 있소?” 하고 물으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인데, 심부름 중에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들이는 중입니다” 하였다. 박문수 어사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 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줬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지마는 박문수 어사가 가만히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이렇듯 장승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하고 정 많은 우리의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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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아리랑학교’,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 성료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2017년 문경 시민들이 발족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이만유)가 주관하는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지난 13일 올해 두 번째로 개최됐다. 이날 문경새재 주흘관 옆 소나무 숲에서 열린 문경시의회 서정식 부의장, 문경시 문화예술과 유미숙 과장, 여운황 팀장, 채재황 주무관이 참석했고 320여 명의 관광객이 함께했다.날씨도 화창하고 관광객들이 많아서 준비한 교재 등이 부족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만유 회장은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 목적은 우리 문경시민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의 시원과 정체성을 제대로 알리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전 국민이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며" 그래서 실내에서 한정된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소극적인 방법보다는 문경의 대표적 관광명소를 찾아서 시민들은 물론 각지에서 찾아오시는 외부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친숙한 공간을 무대 삼아서 문경새재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다양한 공연을 선사하는 버스킹으로 운영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 관광객은 "문경새재를 찾아왔다가 갑자기 만나게 된 마당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어울려 춤추며 노래하는 가운데 문경새재아리랑의 가사가 자연스럽게 가슴속에서 머릿속으로 문경아리랑이 스며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관광객이 모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식전 행사로 한두리국악단(단장:함수호)의 ‘사물과 태평소 공연’ 한판이 펼쳐졌다. 오후 2시, 위원장의 간단한 개막식 인사를 하고, 아도위합창단과 참여자 모두가 함께 문경새재아리랑 합창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진도아리랑, 본조아리랑 등 아리랑연곡 합창에 이어서 하모니카, 가야금, 피리로 구성된 합주단의 축하연주가 있었다. 다음으로 아리랑학교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기 위해 ‘문경새재아리랑의 전래과정과 이해’라는 주제로 펼친 교육이 있었다. 이어 '영남들노래'와 상주아리랑 공연, 문경새재아리랑 따라 부르기, 그리고 2020년 아도위가 창작한 창작아리랑 '코로나아리랑' 에 이어 '풍년아리랑' 첫 발표 공연이 이어졌다. 해금 및 피리 독주, 가요 공연, 논매기 소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즉석에서 관객을 대상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따라서 배운후 앞에 나와서 불러보는 5명에게 문경시 홍보 문경특산물 ‘오미자김’을 선물로 전달했다. 예상보다 많은 호응이 있엇다. ‘다듬이 체험’은 언제라도 누구나 원하면 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여 인기를 끌었다. 연세가 많으신 여성분들은 옛 시절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고, 특히 젊은이들은 영상으로만 보았던 간접체험을 직접 체험으로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난생 처음 방망이를 들고 따라해보는 다듬이 장단을 맞춰보는 체험교실은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 즐기고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다음 3차 아리랑학교 행보는 다음달 11일 경기 양주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 문경을 2번이나 방문한 사할린아리랑보존회(회장:최미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만유 회장은 "2018년 문경찻사발아리랑축제와 문경새재아리랑축제에 와서 문경아리랑을 체험하고 갔던 단체라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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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2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지역 서낭당(성황당) 중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일정 규모의 당집에 서낭신을 모시며, 서낭신(성황신) 또한 영험하다 하여 전국에서 무속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서낭당으로 세 곳을 꼽는다면, 문경읍에 있는 ‘문경새재성황당’과 마성면‘돌고개성황당’, 산양면 ‘현리서낭당’이다. 이곳에는 애달프고 재미있는 전설을 품고 있거나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수많은 이적(異蹟)과 신비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진남교반(鎭南橋畔)과 고모산성(姑母山城)이 있는 곳에 영남대로 상 가장 험난한 구간 중의 하나인 토끼비리(관갑천串岬遷, 토천兎遷)와 석현성(石峴城)을 지나면, 우리나라 서낭당 고갯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돌고개성황당’이 있다. 이곳은 영남과 한양 간의 중요한 통로로서 200여 년 전 과거 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 주막촌에서 떡을 팔아 살아가는 조그마한 초가집 주막에서 하룻저녁을 유숙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버지와 젊고 아름다운 딸이 살고 있었다. 운명인 듯 선비와 딸은 한눈에 서로 반해 백년가약을 맺기로 굳게 약속하게 되었으며 선비는 헤어지기 아쉬워 바쁜 과거 길이지만, 사흘을 더 머물다 가게 되었다. 마지막 날 밤에 꿈속에서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나타나 글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주어 그 글을 몇 번 읽고 난 뒤 잠에서 깨어났는데 생시인 듯 선명하게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선비는 "참으로 기이하구나” 하며 서둘러 길을 떠나면서 처녀의 손을 잡고 " 내 꼭 장원급제한 후 다시 돌아오리다”하고는 한양으로 떠났는데 과장(科場)에 도착하고 보니 꿈속에서 산신령이 주어서 보았든 그 글귀가 과거시험 시제(詩題)로 나왔고 선비는 당연히 쉽게 글을 지어 대과에 장원급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장원급제한 선비는 처녀와의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고 출세를 위해 명문 재상가의 사위가 되었고, 삼 년이 지나도 선비가 오지 않자, 돌고개 주막집 처녀는 참다못해 선비를 원망하며 목을 매어 자결한 후 원귀(怨鬼)가 되었고, 때로는 큰 구렁이로 변하여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을 해코지하였다. 10여 년 후 그 선비가 경상감사가 되어 부임하면서 이 고개를 넘다가 옛 생각이나 처녀를 수소문해 보고 난 뒤 그간의 사연을 듣고 크게 후회하며,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더니 이후 원한이 풀려 재앙이 없어지고 평화로운 주막거리가 되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이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이 성황당에 빌면 과거급제도 하고 먼 길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으며 소원성취도 할 수 있다 하여 기원의 장소가 되었다. ‘문경새재성황당’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편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새재성황신과의 인연으로 얽힌 전설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이란 제명으로 이미 기고한 글이 있어 줄거리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최명길이 소싯적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게 되었다. 문경새재를 지날 때 소복한 여인으로 변신한 성황신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어느 보부상이 바친 비단 치마저고리를 안동 모 좌수가 자기 딸에게 주려고 가져갔는데 그 옷을 찾고 죗값으로 그의 딸을 죽이려 안동에 간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안동에 도착한 최명길은 좌수의 집을 찾아가니 곡성이 들리고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청년 최명길이 좌수의 딸 옆에 있는 성황신을 만나 "문경새재에서 만난 것도 큰 인연인데 나를 보아 살려주십시오” 해서 딸을 구해주었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사차 성황신을 찾았더니 "당신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멀지 않아 국난이 있을 것이니 그때 싸우지 말고 화친(和親)해야 함을 명심하라” 하였다. 뒷날 병자호란 때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해 전란의 피해를 줄이고 나라를 구하게 되었으며 성황신의 말대로 큰 인물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문경새재 성황신이 영험하다 소문이 나서 지금까지도 전국에 많은 사람이 횡액(橫厄)을 쫓기 위해 기도하러 오고 있으며 무속인들의 내림굿 명소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산양면 ‘현리 서낭당’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왕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전투를 했다는 근암산성(近巖山城)이 있는 현리 뒤편 근암산 정상에 있다. 특이하게도 현리 마을에서는 두 곳에 서낭신을 모시고 있는데 마을 안에 있는 ‘구봉당’이라는 신당이 하나 더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현리 서낭신이 남자 신인데 구봉당 서낭신은 여자 신으로 현리 서낭신의 첫째 부인이며, 더 놀라운 것은 둘째 부인까지 금천(錦川) 넘어 멀리 산북면 대상리 ‘한두리당(수푸당)’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현리 서낭신과 안 서낭인 첫 번째 부인과의 만남은 마을 안 구봉당에 가마를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현리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밤이 되면 근암산에 있는 서낭신을 마을 사람들이 가마로 모셔 오셨다. 서낭신을 상징하는 철마를 태운 가마를 구봉당 앞에 내려놓고 그 안에 있는 철마와 함께 구봉당에서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였다가 다음날 모시고 갈 때는 혼례잔치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둘째 부인과의 만남은 마을 사람들이 가가호호 내놓은 볏짚으로 1km가 넘는 긴 새끼줄을 꼬아 근암산 정상에 있는 서낭당에서부터 산북 대상 한두리당까지 연결하여 철마에 서낭신을 태워 보냈다고 한다. 철마 목에 달린 방울의 소리가 달랑달랑 울리면 그곳 마을주민들은 서낭신이 이제 둘째 부인을 만나러 오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예전에는 근암산 정상 서낭당에는 철마 서너 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최근까지 구봉당에 어른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인 철마 두 필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그것마저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낭신 태운 가마와 철마는 민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신승물(神乘物)로 보면 될 것이다. 그 외 현리 서낭당의 유래담과 영험담을 필자가 직접 현지에서 조사 정리한 것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제사를 지낼 때 기름종지불을 당주집에서 떡시루 위에 올려서 당집까지 약 2km 이동하였는데 지금까지 수 대에 걸쳐 한 번도 중간에서 불이 꺼진 적이 없었고 이동 중에는 바람이 불다가도 잠잠해진다고 하였으며, 기름종지불은 당집에 두고 오는 전통이 있는데 그 종지불을 꺼지지 않게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안방에 모신 후 합방하면 생남(生男) 한다는 풍습이 있다. - 근래에도 서낭신이 영험하다 하며 대입, 취직 등 소원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고 있으며 서낭당 동북쪽 50m 밑에 정화수용 우물이 있고 그 우물물을 떠 놓아야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우물이 눈에 띄지 않거나 다른 곳의 물을 사용하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물이 눈에 띄면 서낭신이 대면을 허락하는 것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 제사용 음식은 당주집을 떠난 이후 절대로 땅에 놓으면 안 되고 쉼 없이 가야 한다. - 서낭당 근처에 묘를 쓰고 난 뒤 호랑이가 나타났다. - 서낭제를 올리기 위해 걸립하여 모은 돈으로 노름을 한 사람이 그날 물에 빠져 죽었다. - 당주가 제수용 떡을 하러 가다가 생쥐를 밟아 죽게 했는데 동제를 지낸 후 크게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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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옛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나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있고 장승이 서 있다. 문경에도 신현리 돌고개와 문경새재 옛길을 비롯해 마을마다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요즈음 장승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문경시 공평동 ‘장성백이’ 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 입구와 영순면 금림리, 산양면 진정리 등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에 있어 마을에 들어오는 액(厄)이나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곳이며. 동제(洞祭) 혹은 마을굿, 당제, 당신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마다 미리 정해져 있는 날에 주기적으로 제사나 굿을 여는데 그 주된 기원 역시 제액초복(除厄招福, 액을 막고 복을 부름)을 비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서낭당은 신성한 곳이며, 서낭당 앞에서는 부정한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특히 서낭당의 신목(神木)에 해를 가하거나 쌓인 돌이나 돌탑을 훼손시키면 재앙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며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하고, 침을 세 번 뱉는 행위를 하면 재수가 좋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으며 돌탑이 완성되면 돌을 정성스럽게 쌓은 사람들의 소원도 다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목이 오래되어 수명을 다해 고사했는데도 베어내지 못하는 것은 나무를 베는 사람이 큰 병이 들거나 급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서낭나무와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累石壇)이 함께 있는 것, 둘째는 누석단만 있는 것, 셋째는 서낭나무만 있는 것, 넷째는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것, 다섯째는 입석만 있는 것이다. 또 서낭나무에는 때 묻은 저고리, 동정, 백지(창호지), 모발,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엽전이나 재물, 베 조각, 5색 비단 조각, 짚신, 짚으로 만든 방망이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각각의 물건들에는 기원의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환자가 입던 저고리 동정을 거는 것은 서낭신이 병을 거두어 가라는 뜻이었고, 백지를 거는 것은 행운과 초복의 기원이며, 베 조각은 아이의 장수를 비는 것이며, 엽전이나 재물을 바치는 것은 재리(財利)를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며, 치마를 걸어 놓는 것은 분가할 때 나쁜 귀신이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며, 오색 천을 다는 것은 서낭신께 드리는 예단이다.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의 본딧말이라고 하나 일부 학자들은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성황당은 동네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고 한 칸짜리 당집으로 지어져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것이며, 서낭당은 동네 어귀에 돌무더기, 나무 등으로 모시고 오색천이나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을 감고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황은 마을을 보호하고 지키는 군주(君主)의 위치이고 서낭은 마을 어귀에서 적(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병사의 위치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 서낭당, 성황당(城隍堂), 할미당(전라남도), 천왕당(경상북도), 국사당(國師堂-평안도) 등으로 불린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웠는데 조선 태종 14년에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 (大堠)를 설치하여 1식(一息)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하였으며, 나무를 심거나 돌무더기를 쌓도록 하였고 장승도 그 일종으로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한편 나쁜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했다.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치켜 올라간 눈, 큼지막한 주먹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해학적이면서도 무서운 느낌을 준다. 이런 무서운 얼굴에는 악귀나 병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소박한 뜻이 담겨 있다. 장승은 주로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는데 대다수가 남자 장승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낭당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서낭 신앙이 전래한 것은 고려 문종 때로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神號)를 가봉(加封)하였던 일도 있었고,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서낭당이 생긴 유래는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가장 크며, 서낭 신앙에는 내세관이 없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일설에는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옛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부인과 얽힌 서낭당 유래 전설이 남아 있다. 강태공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 매일 같이 낚시만 하고 다니는 강태공이 집안일은 돌보지 않아 살기가 힘든 아내가 항시 불평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의 부인이 멍석에 널어놓은 피가 소낙비로 다 떠내려가는데도 강태공은 이를 덮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아내가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 강태공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강태공이 천하를 주유하는 중에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문왕을 만났고 언행이 남다른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재상이 된 강태공이 금의환향 돌아오는 길에 들에서 피를 뜯던 한 여인이 강태공을 찾아와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강태공을 버리고 떠난 아내였다. 강태공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 오게 한 후 물을 땅에 부어 버리면서 하는 말이 "어디를 가지 말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이 바가지에 물이 가득하도록 담으면 너와 같이 살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의 원을 들어줄 수 없다” 하니, 여인이 "여보 우린 그때 가난해서 피죽으로 연명하고 살았는데 당신과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이 다 떠내려가는데도 그냥 책만 읽고 있었던 당신도 잘한 것이 없으니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으나 강태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아내는 어떻게 하든 바가지에 물을 채워 함께 살아 보려고 흐르는 눈물과 침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고,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끝내 강태공이 원하는 만큼은 채워지지 않았고 무심한 듯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리고 여인은 그만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강태공은 죽은 옛 아내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고, 죽은 여인의 시신을 치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지나는 길손들이 하나둘 돌을 던져 그의 시신을 덮어 주게 되었고, 그렇게 쌓인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강태공의 아내가 침과 눈물로도 못다 채운 바가지에 침을 뱉어 주어 죽어서라도 그 한을 풀도록 하겠다며 지금도 서낭당을 지나는 길손들은 서낭당에 돌 셋을 던져 탑을 쌓아 주고 침을 세 번 뱉고 가는 풍습을 남기게 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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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문경찻사발축제 29일 개막...내달 7일까지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명예 문화관광 축제인 '2023문경찻사발축제'가 '찻사발에 담긴 천년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지난 29일 개막했다.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오는 7일까지 이어진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명예 문화관광 축제로 올해 25회째를 맞는다. '문경찻사발 세계로 비상하다'라는 문구를 띄우는 행사로 시작한 문경찻사발축제 개막식은 김희재, 장민호 등 인기가수들의 축하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날 개막식에서 문경시는 인기가수 박서진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이번 축제에서는 문경 찻사발이 값비싼 도자기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쉽게 구매하고 생활도자기로 사용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려 한다는 것이다. 축제 참가 부스마다 생활 도자기를 출품해 관람객의 구매 의욕을 높이도록 했다. 이만유 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장은 "이번 축제의 백미로 꼽을 수 있는 무형문화재 특별전, 도예 명장 특별전, 한·중·일 찻사발 국제교류전은 놓치지 않아야 하는 필수 코스이다. 문경 도예 명장의 작품과 한·중·일 도예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만날 수 있다. 국내외 많은 작가들이 영감을 받고 간다."라고 전했다. 또 찻사발 빚기·황금 찻사발 찾기·차담이 인생네컷 등의 체험행사, 명품 및 생활자기 경매, 문경 전국 발 물레 경진대회 등도 펼쳐진다. 특히 부대 행사 중 1천만 원 상당의 황금 다완 경품추첨 및 글로벌 스타 월담스토리 등 눈길 끄는 행사와 한복 패션쇼, 이은결 매직 판타지 여행 등 온 가족이 즐기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부대행사 등 관람객의 세대별 연령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강화해 축제의 재미와 품격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4년 만에 전면 오프라인 축제로 개최되는 제25회 문경찻사발축제 준비에 관계자 모두가 어느 때보다도 만전을 기했다"고 밝혔다. 축제 기간 중 입장료와 주차요금도 모두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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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6‧25 전쟁 영웅 박동진 중사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몇 년 전 문경시 관내 초등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확립과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충효교실’을 문경문화원이 운영할 때 4일간 일정의 전담 강사로 위촉받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교육 주제는 충효 중에서 효(孝)는 차기 교육으로 미루고 ‘충(忠)’으로만 해서 오래전부터 문경에 세거한 큰 문중의 조상 중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충신과 문경을 빛낸 호국 인물이신 엄흥도, 이강년, 박열, 김용배, 박동진, 5분을 선정 그분들의 업적과 위대한 생애를 기려보고자 하였다. 본고는 5분 중 20세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산화하신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박동진 중사에 대한 행적을 알기 위해 노력했으나 출생지 문경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구할 수 없어 국가보훈처에서 2016년 ‘이달의 6‧25 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어 낸 홍보 자료를 참고하였다. 위기에 처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1950년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국제연합(UN)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추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배경에는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덕적도, 영흥도 탈환에 목숨을 바친 박동진(1930.1월 28일∼1950.8.20.) 해군 일등병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첩보대의 지상명령"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하라!”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1930년 1월 28일, 경북 문경(유곡동 한절골)에서 태어나 1949년 1월, 해군 신병 12기로 입대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해 8월, 북한군은 연안 가까이에 있는 일부 도서를 점령하고 무고한 일반 주민을 학살했고, 또한 아군 함정의 동정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이곳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두면 해군의 동향이나 작전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당시 유엔군이 시도하려던 인천상륙작전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0년 8월 해군은 정보 수집과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함정의 승조원으로 구성된 육전대(陸戰隊)를 편성했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다. 육전대는 해군에 소속되어 작전을 돕고, 필요할 시 육전에 종사하는 군대로서 지금의 해병대였다. 이때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해군 1함대에서 차출, 육전대 1소대 1분대장으로 참전하였고, 8월 18일에 덕적도를 향해 떠났다. 아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착륙하여 산악고지를 도주하던 북한군을 격파하고 덕적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8월 20일, 영흥도로 진입, 북한군에게 맹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포로 4명을 구출했다. 북한군은 이미 덕적도를 빼앗긴 상황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영흥도 자체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었던 만큼,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를 비롯한 육전대는 끝까지 적을 몰아세웠다. 추격 중 적의 은신처를 발견한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부하들의 전진을 우선 정지시킨 후, 수류탄을 빼내 들고 엄호받으며 단독으로 돌진했다. 첫 번째 수류탄을 성공적으로 투척하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던 순간, 안타깝게도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의 가슴에 적의 탄환이 관통하였다. 분대장이던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이삼재 부분대장이 이를 대신해 또다시 수류탄을 들고 돌진했고, 적의 집중사격으로 그마저 전사하자 전 분대원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해군은 영흥도를 완전히 탈환했고, 덕적도와 영흥도의 탈환은 9월 15일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인 전공을 올리게 되었다. 박동진이 적의 공격으로 인해 쓰러지면서 무장이 부족했던 동료들을 위해 "내 총 가져가라!” 소리치며 자신의 기관총을 던져준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정부는 피로서 조국을 지킨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우리 문경 출신 전쟁영웅 고(故) 박동진 중사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명명한 해군 유도탄고속함 15함인 ‘박동진함 해군부대’를 창설하고 2014년 4월 1일 취역하여 영해를 수호하고 있다. 이날 문경시(시장 고윤환)는 해군 박동진함 부대와 자매결연식 개최하였다. 그리고 2017년 3월 24일에는 영웅께서 태어나신 고향 마을, 경상북도 문경시 유곡동 292번지에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표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6․25전쟁영웅 박동진 중사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우리 고장, 문경을 빛내고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문경인,‘ 6․25전쟁영웅 박동진 중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도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위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작전을 성공시킨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다.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박동진 중사를 추모하며 -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 이제 고이 잠드소서 비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님의 이름을 단 유도탄 고속함 ‘박동진함’이 바다를 지키고 있고 그날의 그 용맹스러운 충의는 대한민국이 있는 한 님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영웅으로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